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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권력"

박영주의 chronique

"은혜로운 권력"

등록 2022.07.14 08:02

"은혜로운 권력" 기사의 사진

예전보다 일찍 찾아온 폭염 경보와 치솟는 물가 등으로 불안, 불쾌 지수가 올라가는 즈음인데 전, 현직 대통령 자택 앞의 시위 관련 뉴스를 보니 목불인견이 따로 없다. 법대로 한단다. 온갖 분노와 증오가 배어든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고 심지어 시위가 돈벌이 수단으로까지 이용되고 있는 '합법적'인 시위, 일상의 갖은 번잡스러움이 트라우마가 되는 요즘이다. 권력의 가고 옴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텐데, 시위에 등장하는 온갖 표현을 보고 듣고 있자니 권력의 혐오성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아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정치보복이다, 아니다, 설전을 거듭한다. 혐오 정치의 주기적 배턴터치 외에 다른 유형의 권력 행사는 불가능한 것일까? 눈에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만이 최선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에도 권력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는 분노를 표출하고, 시위하며 보복해야 하는가. "눈에는 눈으로의 전략은 이 세상을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라고 한 간디의 말을 우리는 언제까지 되새겨 보아야 할까.

분노는 대표적인 부정적 정서인 만큼 우리 자신과 집단 안에 자라게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분노 표출 대상인 타인과 그들의 집단은 물론 나와 내집단까지 병들게 하고 갈등만을 조장하는 사회를 만들 뿐이다. 권력의 새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분노와 증오를 담은 적폐 청산으로 나와 우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상호 파괴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서로 간의 반목을 키우고 멀어지며 우리가 절실히 원하는 갈라치기, 차별이 없는 공동체에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전 권력의 적폐 청산의 결과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 나아가 이전 권력의 잘못이라고 믿거나, 믿게 하려고 설득하는 것은 권력의 새 옷 역시 그저 환상 속의 옷이라는 위험에 빠질 뿐이다.

필연적으로 상호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혐오적 권력의 배턴터치에서 벗어난 다른 유형의 권력, 예를 들어 "은혜로운 권력"은 어떤가! 분노하고 저항하되 갈등 정치, 혐오적 권력을 넘어서는 이른바 은혜로운 권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은혜로운 권력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로 들릴 수 있겠다. 게다가 은혜로운 권력에 대해 고민하자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은혜로운 권력은 진상 규명이 필요한 일이나 시비를 가려야 하는 일의 절차를 무시 또는 생략하는 단순한 시혜, 은전, 용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전 권력의 평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계승할 수 있는 것은 하되 잘못된 일들의 처리, 처벌 역시 평등하고 공평한 법의 잣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과 현재 권력 간의 갈등이나 보복을 부르지 않는 의미의 은혜로운 권력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지나간 권력 때문에 분노할 수 있다. 다만 이 분노의 표현이 나와 우리가 본 피해를 갚고야 말겠다는 마음먹음이나 폭력적 행동 없이 그 부당함 자체에 분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자면 지난 권력이 저지른 잘못된 일(들)이 있다면, 그 일(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규범을 위반한 것일 때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항의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벌어지고 난 후에야 상황이 어땠어야 하는지 쉽게 보이는 법이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보복을 이어나가기보다는 은혜롭게 다가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다수의 국민을 위한 미래지향적 현명함이 아닐까. 권력의 배턴터치는 과거는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우리는 이전의 결과로부터 배우고 발전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로운 권력"에 관한 필자의 생각이 그저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함일 수 있고 권력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욕망을 무시하는 '철없는' 것일지라도 과연 은혜롭게 다가가는 권력은 불가능한가에 대한 자문은 지속되고 있다.


뉴스웨이 문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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