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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내다본 기업인’···무자원 산유국-ICT 강국 기틀 마련

[SK 최종현 회장 20주기①]‘10년을 내다본 기업인’···무자원 산유국-ICT 강국 기틀 마련

등록 2018.08.20 09:00

강길홍

  기자

섬유 회사였던 SK 재계 5위 반열주변 우려에도 과감한 투자 감행 “준비한 기업 언제든 기회가 온다”한국경제 일군 기업가 정신 재조명

故 최종현 회장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최종현 회장은 제 2차 석유파동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원유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사진=SK그룹 제공故 최종현 회장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최종현 회장은 제 2차 석유파동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원유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사진=SK그룹 제공

섬유회사에 불과하던 선경(현 SK)이 정유와 통신을 양날개로 하는 SK그룹으로 발전하기까지는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바탕이 됐다. 특히 최종현 회장은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와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에 성공한 뒤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루고 ‘ICT 강국’의 기반을 닦았다.

최종현 회장은 형인 최종건 선경그룹 창업주에 이어 2대 회장에 오르면서 SK를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최종현 회장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첫 번째로 현실화했다. 당시 유공은 연매출 1조원을 돌파한 국내 유일의 기업이었다.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재벌들이 유공 인수전에 뛰어든 가운데 비교적 작은 회사였던 SK가 유공 인수에 성공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는 평가가 나왔다.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종현 회장은 ‘섬유에서 석유까지’ 수직계열화를 목표로 세우고 석유사업 진출을 10여년간 준비했다. 특히 중동지역 왕실과 네트워크에 공을 들이면서 오일쇼크 상황에서도 국내에 원유를 들여올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같은 ‘석유외교’ 능력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으면서 유공의 최종 인수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기업이 어떠한 사업이든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최종현 회장의 신념이 적중한 것이다. 이때부터 최종현 회장에게 ‘10년을 내다보는 기업인’이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최종현 회장은 유공을 인수한 뒤 단순히 국내에 원유를 공급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해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이동통신 사업 역시 10년 이상 공들이면서 준비했다. 미래설계가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한 최종현 회장은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웠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은 최종현 회장은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 사업자에 선정됐다. 숙원 사업이던 정보통신 사업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지만 최종현 회장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오히려 사업권을 반납한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장이었던 자신이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면 재계의 화목이 깨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이었던 만큼 특혜시비에도 신경을 썼다.

결국 최종현 회장은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며 내부 구성원을 설득하고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게 된다. 이후 SK그룹은 민영화되는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상장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 주가는 8만원 수준이었는데 민영화 소식과 함께 30만원 가까이 상승했다.

SK그룹은 당시 시가를 훨씬 뛰어넘는 주당 33만5000원(총 4271억원)을 써내면서 지분 23% 인수에 성공했다. SK그룹 내부에서조차 인수가가 지나치게 높다며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최종현 회장은 “특혜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SK그룹은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게 됐다. 이후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에 성공하는 등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올라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종현 회장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뒤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쾌거라는 평가다.

최종현 회장은 SK그룹을 재계 5위까지 올려놓았지만 늘 나라경제를 먼저 생각했다. 전경련 회장 시절인 199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울 때도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청와대를 찾아가 경제 살리기를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나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지원을 받게 되자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이후 병세가 악화된 최종현 회장은 1998년 8월26일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었단 시기에 전경련 기획홍보본부장을 지냈던 권오용 효성 고문은 “최종현 회장은 사업에 대한 욕심이 많았는데 기반을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에서 찾는 인재경영을 펼쳤다”면서 “경영에 있어서도 즉흥적 판단이 아니라 SKMS(선경경영관리체계)를 만들고 시스템 경영을 실행했다”고 말했다.

뉴스웨이 강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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