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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은 누구?

[문재인시대]19대 대통령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은 누구?

등록 2017.05.10 00:09

수정 2017.05.10 00:10

김승민

  기자

盧와 文, 인권변호사 동지에서 정치 동반자로친노 계승한 친문세 바탕으로 대선 주자 등극2003년 민정수석에서 2017년 대통령으로

문재인 대통령. 사진=이수길 기자문재인 대통령. 사진=이수길 기자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에게는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제 16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구다. 문 당선인은 대표적 친노 인사·적자로 꼽히며, 친노 정신을 계승하는 친문의 구심점이기도 하다. 한때 자신은 정치와 맞지 않다며 선을 그어왔지만 이제는 향후 5년간 대한민국 수장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게 됐다. 그의 정치행로 첫 시작점에는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있다.

문 당선인과 노 전 대통령이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변호사였다. 사법연수원 수석이었던 문 당선인은 판사를 지망했지만 학생운동 전력으로 좌절됐다.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이를 마다하고 고향인 부산행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연수원 동기가 문 당선인에게 노 전 대통령을 소개했고 둘은 합심해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인권변호사 길에 들어섰다.

‘깨끗한 변호사’를 지향하며 사건 알선 브로커, 판검사 접대는 끊고 사무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마다하지 않는 두 변호사에게 시국, 인권 관련 사건들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곧 영남지역 대표 인권변호사로 이름 날리게 됐다. 문 당선인은 이 시절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대학생 시절 투신했던 민주화운동에 다시 참여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국본 결성 시 노 전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장, 문 당선인은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정신적 동반자로서 관계를 다져온 문 당선인과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정치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게 됐다. 부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노 전 대통령은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 공천 제안을 받았다. 문 당선인 역시 같은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법률사무소의 대표로 남았다.

인권변호사 길을 이어가던 문 당선인을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것은 노 전 대통령이었다. 그가 2002년 대선 경선에 나설 때 문 당선인은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아 그를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신승 후 문 당선인은 변호사 복귀 의사를 밝혔으나 노 전 대통령의 “나를 대통령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냐”는 말에 민정수석으로서 청와대에 입성했다.

민정수석 시절 문 당선인은 격무에 이가 10개나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당에서는 각종 선거 때마다 출마를 요청했고 그때마다 문 당선인은 “나는 정치와 맞지 않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건강악화와 당의 요구에 부담을 느낀 문 당선인은 결국 2004년 2월 민정수석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히말라야 트래킹에 나서는 등 휴식을 취하다가 노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후 문 당선인인은 노 전 대통령 임기 말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8년 노 전 대통령 퇴임 후에는 문 당선인도 양산에 마련한 거처로 내려갔으나 다음해 완전히 정치인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정권이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뇌물수수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의 압박 수사 강도가 갈수록 강해졌다.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은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문 당선인은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그의 장례를 도맡았다.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했다.

노 전 대통령 장례 과정에서 문 당선인이 보여준 절제력은 친노를 비롯한 정치권에 큰 인상을 남겼다. 야권에서는 문 당선인이 2009년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선과 2010년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초반에는 거부의사를 보였던 그도 2011년 혁신과 통합 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며 정치권 진입 준비를 했다. 2012년 4·11 총선에서는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세계에 입문했다.

문 당선인은 2012년 6월 제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내 핵심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정권교체와 야권대통합이라는 명분을 진 문 당선인은 우여곡절 끝에 경쟁 상대였던 안철수 후보,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고 역대 야권 대선후보로는 최대 득표수 1469만표와 득표율 48.02%를 얻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하고 만다.

다음 기회를 도모한 문 당선인은 2014년 당 대표로 출마, 당선되지만 이때부터 그를 받쳐주는 유산이자 지지기반인 친노·친문이 ‘패권세력’이라는 멍에를 동시에 쓰게 됐다. 2015년 같은 당 소속이었던 안철수 의원은 19대 대선을 노리며 탈당을 선택하고 그를 따라 많은 의원들이 당을 나갔다.

이 시기 당은 계파분열이라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그러나 문 당선인이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대표를 필두로 참신한 인재들을 여럿 영입하고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당과 문 당선인의 위상은 올라가게 된다. 단 김종인 전 대표가 당 전권을 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노·친문 패권주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김종인 전 대표 역시 당을 나가게 됐다.

2016년 말 초유의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문 당선인은 다시 한 번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제 19대 대통령 선거의 야권 주자로 떠올랐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도지사, 최성 고양시장과 경쟁해 당 대선 후보가 된 문 당선인은 친노·친문 지지세를 대선 승리 원동력이자 약점으로 안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경쟁했다.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후 조기대선이 이뤄진 2달간 문 당선인은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고수했다. 모든 경쟁 후보로부터 가장 격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견고한 친노·친문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의 동지로서 2003년 청와대를 첫 방문한 후 14년 만에 그의 동지처럼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다시 입성하게 됐다. 이제 대통령이 된 문 당선인이 어떤 국정을 펼친 것인지, 또 집권기간 동안 대선 후보 때와 같은 탄탄한 친노·친문 지지도를 유지하면서 패권주의 멍에를 벗어던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뉴스웨이 김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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