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24일 수요일

  • 서울 13℃

  • 인천 15℃

  • 백령 12℃

  • 춘천 13℃

  • 강릉 9℃

  • 청주 16℃

  • 수원 16℃

  • 안동 12℃

  • 울릉도 13℃

  • 독도 13℃

  • 대전 15℃

  • 전주 16℃

  • 광주 16℃

  • 목포 15℃

  • 여수 15℃

  • 대구 14℃

  • 울산 13℃

  • 창원 18℃

  • 부산 16℃

  • 제주 18℃

‘첫 탄핵 대통령’으로 불명예 퇴진···영욕의 정치 인생

[박대통령 파면]‘첫 탄핵 대통령’으로 불명예 퇴진···영욕의 정치 인생

등록 2017.03.11 13:46

수정 2017.03.11 13:51

한재희

  기자

20년 정치 인생, 선거의 여왕·첫 여성 대통령 등견고한 지지 받으며 2012년 대통령 당선 됐지만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첫 파면 대통령 불명예

박근혜 전 대통령은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판결에 따라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됐다. 사진=이수길 기자 leo2004@newsway.co.kr박근혜 전 대통령은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판결에 따라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됐다. 사진=이수길 기자 leo2004@newsway.co.kr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 ‘첫 여성 대통령’에서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으로 추락했다. 20년에 걸친 박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결국 불명예 퇴진으로 마무리 됐다.

박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을 거쳐 제5~9대 대통령을 지낸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애(令愛)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 청와대로 이사했을 때 박 전 대통령 나이는 12세였다.

어린 시절을 청와대에서 보낸 뒤 197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같은 해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하자 급히 귀국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박 전 대통령은 영애에서 퍼스트레이디로 변신하게 된다. 이 때 22세였다. 이 과정에서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 활동을 하며 국정농단 사건을 일으킨 최순실씨와의 인연을 맺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흉탄에 서거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가 18년간 긴 칩거생활을 시작한다. 이 기간에 육영재단 이사장과 정수장학회 이사장, 영남대 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지만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박 전 대통령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보수 진영의 끊임없는 러브콜에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당시 이회창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 됐다.

이듬해인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15년 동안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 등을 거치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이끌었다. 이후 대구지역의 든든한 지지층을 기반으로 제16·17·18대 대구 달성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됐다.

당시 한나라당이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사건 등 사상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2004년 구원투수로 등장해 2년 3개월간 당 대표를 역임했다. 이때 ‘천막 당사’를 설치하고 천안 연수원을 매각하는 등 파격 행보를 보이며 대선주자로 떠올랐다.

특히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 됐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이 칼에 찢기는 테러를 당한 와중에도 “대전은요?”라고 물어 선거 판세를 뒤집었던 일화는 여전히 회자된다.

‘선거의 여왕’에 이어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으로 각인 된 것은 2007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결과를 깨끗이 승복하면서부터다.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패한 뒤에는 결과를 인정하고 비주류로 밀려 친박계를 이끌었다.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선 패배와 디도스 공격 파문 등으로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하자 당 전면에 재등판했다.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며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등 또 한 번 파격 행보를 보였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확보해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 입증했다.

이후 압도적인 지지율로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 ‘최초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렸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으로 34년 만에 청와대에 재입성 했다.

하지만 국정 운영은 순탄치 못했다. 집권 첫해인 2013년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고 이듬해인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해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해 분위기를 일신하는 듯했지만 연말 ‘정윤회 문건’ 파동이 터졌다. 박 전 대통령 지지율은 처음으로 30%대로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에도 불통의 정치는 계속 됐다. 야당 뿐 아니라 여당과도 소통하지 않으며 일방적인 국정 운영을 강행했다. 반대 여론을 고려하지 않고 국정 역사교과서, 개성공단 폐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밀어붙여 불통 이미지는 더욱 강화됐다.

어떤 상황에서도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유지하던 박 전 대통령이었지만 최순실씨 국정 농단 의혹이 증폭되면서 지지층마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지난해 말 지지율은 4%까지 떨어졌다.

결국 지난해 12월9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명으로 가결됐다. 박 전 대통령은 검찰과 특검 조사에 임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어떤 것도 실행하지 않으며 여론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을 향해 “헌법 수호 의지가 없으며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며 만장일치 파면 결정을 내렸다.

많은 수식어를 가지고 정치생활을 이어온 박 전 대통령은 ‘최초 탄핵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불명예 종지부를 찍게 됐다.

뉴스웨이 한재희 기자

ad

댓글